기억의 지우개
2024년 8월에 ‘나쁜 기억 지우개’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방영되었습니다. 드라마를 모두 챙겨보지는 못했지만, 제목 만큼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습니다. 누구에게나 잊고 싶은 기억 한두 개는 있으니까요. 알리의 노래처럼 원하는 기억만 지울 수 있는 지우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지우개로~ 널 지울 수만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힘들고 아팠던, 상처로 남은 기억들을 잊고 싶어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기억 속에서 느꼈던 견디기 어려운 감정들을 지우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OOO은 잊었어. 다 지난 일이잖아."
이런 말을 내뱉는 순간, 우리의 뇌는 저장된 OOO과 관련된 감정과 장면을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힘들었던 감정은 특정한 단어나 상황, 사람 등의 트리거를 만나면 다시 생생히 되살아나 우리를 괴롭히곤 합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기억을 떠올리지 않아 잠시 잊혀졌을 뿐, 기억 그 자체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기억이 남긴 감정을 전혀 바꿀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연구들에서는 인간의 경험과 그에 동반된 감정이 삭제되기보다는, 변형되거나 대체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이미 만들어진 기억을 완전히 없애기는 어렵지만, 그 기억에 묶여 있던 감정은 충분히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릴 적 아이스크림을 먹다 떨어뜨린 일이 당시엔 속상하고 화가 났던 기억이었다면, 지금은 오히려 귀엽고 웃긴 장면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기억은 그대로지만, 감정은 다르게 저장된 것 입니다.
단, 이 변화는 그 경험을 '기억해낼 수 있어야' 가능합니다.
너무 아픈 경험은 우리는 종종 ‘없는 일’처럼 묻어두고 살려고 합니다. 느끼지 않으면 괜찮을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통을 막으려고 기억과 감정의 문을 닫아버리면, 감정을 바꿀 수 있는 입구조차 막혀버립니다.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를 떠올려보세요.
물이 고이면 썩기 마련이지만, 새로운 물길이 들어오면 고여 있던 물을 밀어내듯이, 우리 감정도 길이 트이면 조금씩 순환할 수 있습니다. 감정의 물길을 트려면, 먼저 웅덩이가 어디에 고여 있는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기억 속의 힘든 감정을 순화하거나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기억에 얽힌 감정을 바꾸는 다섯 가지 방법
1. 감정을 언어로 표현해보기
말로 표현되지 않은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마음 속 깊이 눌러둔 감정은 어느 순간 더 크게 터져 나오기도 하지요. 누군가에게 말하거나 글로 써보는 것 만으로도 감정은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새로운 시각에서 사건을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2. 신체 감각을 다시 깨우기
몸은 감정을 담는 그릇이자, 표현하는 창구입니다. 스트레칭, 산책, 요가, 간단한 손 운동처럼 반복적인 움직임은 감각의 문을 열고, 기억 속에 갇힌 감정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돕습니다. 예를 들어, ‘긴장’이라는 감정은 어깨 결림이나 두통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가볍게 팔을 돌리거나 심호흡을 하는 것만으로도 한결 편안해질 수 있습니다.
3. 안전한 사람과의 연결
힘든 기억은 대부분 외로움과 함께 남아 있습니다. 그 순간, 혼자였다는 사실이 감정을 더 깊이 각인시키지요. 기억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경험은 감정을 재구성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됩니다. 특히 수용적이고 비판하지 않는 사람과 기억을 나누는 경험은 감정을 재구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4. 기억 위에 새로운 기억 덧입히기
기존의 기억을 지울 수는 없지만, 그 위에 새로운 기억을 덧입힐 수는 있습니다. 과거의 아픔이 떠오르는 공간이라도 지금의 나로서 새로운 경험을 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약간의 용기와 좋은 추억은 오래된 감정의 날을 무디게 만들 수 있습니다.
5. 감정을 다르게 보는 연습
감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다양한 뜻를 담고 있습니다. 슬픔은 그만큼 애썼다는 증거일 수 있고, 분노는 내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보호하려는 움직임일 수 있습니다. 감정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해보는 연습은, 기억을 고통에서 배움으로 전환시키는 힘이 됩니다.
❗️다만,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전문가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강한 트라우마를 반복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경우
일상생활을 방해할 정도로 회피할 수 없는 기억이 지속될 때
신체 증상까지 연결되는 감정의 재경험이 있을 때
이럴 땐 혼자 감정을 다루려 애쓰기보다는,
상담심리사나 관련 전문가와 함께 안전한 환경에서 감정을 다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올해 휴가에서는 좋은 기억을 많이 만드셨나요?
꼭 멀리 떠나지 않았더라도, 좋은 풍경, 시원한 바람,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는 순간들이 있었기를 바랍니다. 그런 작고 소중한 감각의 기억이 과거의 힘들었던 감정을 조금씩 희석시켜 줄 수 있을 테니까요.
기억은 지워지지 않지만, 감정은 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지금 이 순간, 나를 조금 더 느껴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